영화 벌새, 무너지던 1994년과 열네 살의 응시

다리가 무너지기 전에도 세계는 기울고 있었다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2019)는 1994년 서울에 사는 중학생 은희의 한 해를 따라간다. 그해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은 종종 시대극으로 소개되지만, 감독이 참사를 영화의 후반부에야 꺼내 놓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에 가깝다. 재난을 앞세우면 개인의 일상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영화 벌새 광고 포스터



붕괴의 규모가 화면을 장악하는 순간, 그 시대를 통과한 한 사람의 하루는 통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벌새>는 순서를 뒤집는다. 열네 살의 사소한 하루들을 먼저 쌓아 올린 뒤, 그 위에 다리가 무너진다. 참사를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편집의 순서 하나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참사가 왜 일어났는가가 아니다. 무너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기울어 있던 세계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존재를 알아보는 시선이 한 사람을 세운다 

 딱하게 여기는 것과 마주 보는 것의 차이 

 은희를 둘러싼 어른들은 대체로 그를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다룬다. 성적으로, 순종의 정도로, 집안의 서열 안에서 값이 매겨진다. 한문학원 교사 영지만이 다른 방식으로 은희 앞에 선다. 위로하거나 귀여워하는 대신 질문을 건네고, 대답을 기다리고,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는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나와 그것, 나와 너의 관계로 구분했다. 앞의 관계에서 상대는 쓰임새로 환원되고, 뒤의 관계에서 비로소 온전한 존재로 마주 선다. 시몬 베유가 타인에게 온전히 기울이는 주의를 가장 드문 형태의 관대함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지가 은희에게 준 것은 조언이나 보호가 아니라 이 주의였다. 


사람을 세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시선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히 증명한다. 은희가 통과하는 관계들은 대부분 예고 없이 끊긴다. 마음을 나누던 친구는 어느 날 태도를 바꾸고, 자신을 따르던 후배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멀어진다. 어떤 해명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경험의 핵심이다. 사람은 왜 떠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세계는 침묵하며, 열네 살은 그 침묵을 견디는 법을 혼자 익혀야 한다. 관계의 이유를 끝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이 영화가 그리는 성장의 첫 관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몸에 남는다 

은희의 귀 밑에 혹이 생기고 수술을 받게 되는 과정은 서사의 장치 이상으로 읽힌다. 가정 안의 폭력과 학교의 압박, 어디에도 발화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옮긴다. 언어를 얻지 못한 고통이 신체의 증상으로 번역된다는 임상적 통찰이 여기 그대로 놓여 있다. 은희가 아픈 것이 아니라, 은희를 둘러싼 관계가 아팠던 것이다. 

 가장 사적인 장면이 가장 사회적인 장면이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 

 오빠의 폭력은 집 안에서 사고나 남매 다툼으로 축소되고, 부모는 그것을 문제로 명명하지 않는다. 명명되지 않은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되며, 처리된 것은 반복된다. 이 침묵은 특정 가정의 결함이라기보다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 약자의 고통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성장을 위해 안전을 뒤로 미뤘던 시대의 논리와 이 집의 논리는 크기만 다를 뿐 구조가 같다. 


학교 역시 같은 언어를 쓴다. 아이들은 대학 진학을 구호처럼 복창하고, 성적은 인격의 등급으로 환산된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거의 유일한 사다리로 여겨지던 시기에 아이는 자라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자원으로 다루어졌다. 강남의 아파트라는 배경이 단순한 지리 정보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엇을 가져야 사람 구실을 하는지에 관한 합의가 가장 선명하게 작동하던 공간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뒤에 남는 것 

다리가 무너진 뒤 사람들은 슬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으로 돌아간다.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는 같은 형태의 상실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확인했다. 애도란 감정의 소모가 아니라 무엇이 왜 무너졌는지를 끝까지 기억하는 인지적 노동에 가깝다. 그 노동을 생략한 자리에는 슬픔 대신 망각의 속도만 남는다. <벌새>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1994년을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우리가 무엇을 건너뛰었는지를 되묻기 때문이다. 

안간힘은 정지처럼 보인다 

벌새는 초당 수십 번의 날갯짓으로 공중에 머무는 새다. 멈춰 있는 듯 보이는 그 자세가 사실은 최대치의 안간힘이라는 점에서, 제목은 열네 살의 하루를 정확히 옮긴 이름이다.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청소년기의 표면 아래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격렬하게 버티고 있는지, 어른들은 대체로 알아채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은희는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여전히 바라본다. 성장은 답을 얻는 일이 아니라 모르는 채로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조언이 아니라, 그를 사람으로 알아보는 한 사람의 눈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끝까지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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